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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식채널 e - 바보 의사

머찌니7109 2012. 5. 11. 09:42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죽는날까지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한국의 슈바이처'로 부릅니다. 그의 삶을 짧게 압축하는 것은 쉽지만 그의 삶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한 평생을 가난한 환자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인술과 사랑을 실천한 그에게 이 사회가 드려야 할 명함이 있다면 바로 '성인(聖人) 장기려(張起呂)'입니다.

 

 

왜 아픈 사람을 일컬어 환자라고 하는지 아나? 환(患)은 꿰맬 관(串) 자와 마음 심(心) 자로 이루어져 있다네. 상처받은 마음을 꿰매야 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네. 다시 말해 환자란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줄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눈에 보이는 상처는 치유하기 쉽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네. 자네가 진정한 의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환자의 마음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야 하네

 

 

 

[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우리 시대의 성자(聖者) ]

 

장기려 선생은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85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였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 선생의 묘비에 새겨진 비문에도 그의 삶이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 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기려는 송도고보를 거쳐 경성의전에 입학해 의사로서의 길을 시작한다. 격동의 시절 미래로의 뚜렷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는 자신의 인생길에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는 선배 석주명, 가난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친구 김주필, 그의 앞길에 대해 진심어린 충고를 해준 종기의 박 의원 등과의 만남과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새겨준 할머니를 떠올리며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경성의전에 입학한다.

 

< 옷이라는 건 말이다, 네 몸의 온기를 가두어두는 것일 뿐이란다. 옷 자체가 따뜻한 건 아니잖느냐. 그런데도 우리가 옷을 입으면 따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옷이 네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허공으로 헛되이 흩어져버리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결국 온기를 지닌 건 바로 너 자신이란다. 옷 때문에 따뜻한 게 아니고 사람은 원래 그렇게 따뜻한 존재로 이 세상에 나온 거란다. (중략) 기려야, 너는 옷을 여러 번 껴입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옷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이 할머니는 네가 다른 사람들의 옷이 되어줬으면 싶구나. 다른 사람들의 체온을 지켜주는, 옷처럼 늘 사람들 곁에 머무는 그런 사람이 되어준다면 더 바랄게 없겠구나. (49 쪽)>

 

 

 

 

스승 백인제의 가르침속에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며 실력과 명성을 쌓아가던 장기려는 경성의전의 교수직을 물려주려는 스승의 제의와 의사라는 직업을 이용해 부와 명예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마다한 채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송도고보 시절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경성을 떠난다. 그리고 스승이 소개해준 평양의 연합기독병원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 장기려는 바쁜 병원업무속에서도 빈민촌을 돌아보며 무의촌 진료를 시작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팔을 걷어부쳤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내는 그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았으나 기쁨에 젖었던 나라는 곧 분열되었고 다시 3ㆍ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렸다. 전쟁이 터졌고 평양은 그대로였지만 그곳을 점령하는 이념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오갔다. 그런 혼돈 속에서도 장기려는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지켰고, 오직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사로서 환자들을 대했다. 그러나 그 시대를 뒤덮던 고통에서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잠시를 기약하며 차남과 함께 올랐던 피난길은 그대로 가족들과 생이별이 되었다.

 

망연자실하던 장기려는 의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피난민들이 들끓는 부산에서 다시 자신의 서원을 떠올렸고, 어느새 의사로 돌아왔다. 진료소를 세운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고, 무의촌 진료도 계속했다.

 

일제강점기 기홀병원 재직시에 일본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간 설상절제수술을 처음으로 성공했던 그는 해방후 우리나라 최초로 간 대량절제수술에 성공했고,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 의료보합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 부담을 낮춰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을 이용해 개인의 성공이나 이익, 명예를 좇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낮은 곳으로 임했고, 늘 병든 환자들과 함께 했다.

 

 

선생님은 인간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분이다. 그에게는 천한 사람도 없고, 귀한 사람도 없었다. 누구든지 존귀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대하였고, 환자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정을 가졌던 선한 의사였다. 평생 그는 생명을 지키는 일을 의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고, 그것을 실천했다.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다소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며 겸손해 했던 무사무욕의 삶을 실천한 사람.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 최고의 외과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집 한 채는커녕 통장에 달랑 천만 원을 남겨 놓았고, 그마저도 간병인에게 줘 버리고 빈손으로 떠나갔던 사람, 장기려 선생.

 

그가 부산에 남긴 발자취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가치를 깊이 깨닫게 해준다. 그의 삶은 은퇴가 없는 일생이었다. 만년에도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이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세민 환자들을 돌보며, 왕진을 청하는 환자들의 요구를 단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는 가난에 멍든 우리네 서글픈 이웃들에게 소금 같은 존재였다. 서러운 풀잎들에게 한없는 희망을 안겨준 거룩한 영혼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의 인술과 생명, 평화의 정신은 장기려 선생의 전 생애를 엮어간 키워드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를 몸소 가르쳐준 그를 나는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성자(聖者)'라 부르고 싶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를 선생과 함께 살아온 우리로서는 큰 기쁨,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평생 간직하여야 할 것 같다.

 

 

 

[ 이산가족 ]

 

40년을 남한에 살면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뿐 아니라 떠나 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라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몇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둘러보고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선생은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한평생 절개를 지키며 45년을 홀로 살았다. 늘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 했다. 선생을 아는 이들은 그에게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인과 다섯 자녀를 북녘에 두고 온 선생은 민족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산가족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가족상봉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이 땅의 이산가족들이 모두 상봉을 이룬 후에 만나겠다"며 아내에게는 편지만 보냈다고 한다.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해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갔을 때였다.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될 당시 정부에서 사회 문화계 인사들에게 특별히 가족 상봉을 주선하며 장기려 선생에게도 제안을 한 일이 있다. 애타게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는 함께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리가 아니라고, 다른 이산가족들과 떳떳이 고향을 찾겠다며 거절했다. 결국은 평생 그리던 아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욕심을 끝까지 버렸다. 개인적 기쁨과 행복조차도 혼자 독점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장기려 선생의 이야기 다섯토막]

 

우리에게 알려진 그분이 베푼 선행은 헤아릴 수 없다. 걸인이 돈을 구걸하자 현찰이 없어 수표를 줬다는 이야기, 병원비를 내지 못해 발이 묶인 환자에게 몰래 도망가라고 병원 문을 열어준 이야기, 며느리가 혼수로 가져온 이불을 고학생에게 갖다주라고 한 일, 책도둑에게 책대신 돈을 갖고 가라고 했던 일들이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선생은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래 얼마가 필요해'가 아니라 늘 '이것 밖에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 세상 사람들은 선생을 가리켜 '바보의사가 아니라면 성자가 틀림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일까. 병원을 운영할 당시 돈 없는 환자들은 일부러 그의 출근길에 쓰러져 있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일도 있었다. 돈이 있든 없든 환자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탓이었다. 때로는 돈이 있는 사람들도 돈이 없다며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생은 이 마저도 모두 받아들였다. 철저한 무소유의 삶이 아니었으면 가능하기라도 했을까.

 

 

■ "여기가 병원이지 세무서야?"

 

어느날, 복음병원에서 회진을 하러 가던 선생은 벌써 며칠 전에 퇴원을 해도 좋다고 지시한 환자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당신 아직 퇴원 안하고 뭘 하노. 수술 경과도 썩 좋았는데..."

환자는 기려를 보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서무과에서 퇴원을 못한다고 합니다. 모자라는 입원비를 가져올 때까지 신분증을 보관한다고 가져갔습니다."

 

"뭐라고요?" 회진하던 발걸음을 서무과로 돌린 선생은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여기가 병원이지 세무서야?" 화가 난 그는 사무실의 책상을 엎어버렸다. 언제나 온화하고 인자한 원장이 이처럼 화를 내는 모습을 직원들은 처음 보았다.

 

엎어진 서랍 속에서 모자라는 입원비 대신 받아둔 반지나, 시계, 목걸이 들이 튀워나왔다. 선생은 그것을 보자 현기증을 느끼며 걸상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천막 무료병원에서부터 시작한 복음병원이 이렇게 변해 있었다니, 자신이 환자를 돌보는 일에만 열중해 있는 동안 병원은 무료의 뜻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장 병원 문을 활짝 열고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만들었다.

 

 

 

■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경남 거창에 살고 있는 한 가난한 농부는 입원비가 밀려 퇴원할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선생을 찾아가 하소연 하였다. "모자라는 돈은 벌어서 갚겠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환자의 사정을 들어본 기려는 마침 주머니에 돈도 없고 하여 한 가지 묘안을 알려주었다. "그냥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밤에 문을 열어줄 테니."

 

마치 남의 병원에 와서 큰 인심이나 쓰는 듯한 원장의 말이었다. 농부는 원장의 이 말에 깜짝 놀라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어찌 그럴 수가..."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낼 돈은 없고, 병원 방침은 통하지 않고, 당신이 빨리 집에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농부는 그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날 밤 선생은 서무과 직원들이 모두 퇴원하고 난 뒤, 병원의 뒷문을 슬그머니 열어놓았다. 밤이 이슥해지자 이불 보퉁이를 든 가족과 환자가 머뭇거리며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그는 가만히 농부의 거친 손을 잡았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요. 가서 열심히 일 하시오." 농부의 가족은 가슴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원장님, 106호 환자가 간밤에 도망쳤습니다." 간호원의 말을 듣고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뛰어왔다.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주었소." 그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 "얘야, 혼수이불을 고학생 녀석에게 갖다 주거라"

 

홀로 데리고 내려온 둘째 아들 가용이 결혼을 했을 때의 일이었다. 며느리는 혼자 사는 시아버지에 대한 정성으로 비단 이부자리를 마련해왔다. 하지만 선생은 푹신하고 편안해 보이는 이부자리를 보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다니는 교회에서 가끔 만나는 고학생의 모습이 떠오르자 선생은 며느리에게 말했다.

 

"얘야, 이 이불을 그 녀석에게 갖다 줘야겠구나. 겨울에는 늘 감기를 앓는 아이거든..." "아버님 무슨 말씀이세요? 제 혼수가 아버님 보시기에 변변치 않다면..." 며느리는 입은 옷도 거지에게 잘 벗어주고 온다는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남편으로부터 들었지만, 혼수까지 남에게 주자고 할 줄은 몰랐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뜻을 무조건 거스르기가 좀 그랬다. "아버님께서 꼭 그러시기를 원하신다면, 제 성의를 보아 새 이불은 아버님이 쓰시고, 지금 사용하시는 걸 남에게 주면 어떻겠어요?"

 

사리에 맞는 절충안이었지만, 선생은 오히려 며느리의 생각이 엉뚱하다는 얼굴이었다. "얘야, 이왕 남에게 주려면 쓰던 것보다는 새것으로 주는 게 예의가 아니겠니?" 며느리는 더 이상 고집을 부려봐야 이 시아버지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혼수 이불을 고학생의 자취방으로 보냈다.

 

■ "무거운 책보다는 돈이 낫지 않겠소?"

 

병원 경비원이 순시를 하다가 원장 사택쪽으로 숨어드는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얼마 전 한복을 도둑 맞았다는 소문을 들은 경비원은 이번에도 도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경비원은 이 기회에 자기 손으로 꼭 도둑을 잡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원장님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하였다.

 

경비원은 오랫동안 골수염으로 고생했었다. 3년째 누워 지내던 어느날, 외출했던 친척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병을 고칠 방법이 생겼다고 흥분하였다. "장박사가 사택에서 병원으로 오는 길에 자갈밭이 있는데 거기 누워 있다가 그분 눈에 띄어 돈 없어도 병 고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군."

경비원은 친척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마침 출근하는 선생의 눈에 띄어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다.

 

퇴원을 하던 날, 그는 부끄러운 나머지 선생을 찾아가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 마시오. 오죽하면 자갈밭에서 나를 만나려고 했겠소." 선생은 빙긋이 웃으며 오히려 그를 위로해주었다. "당장 힘든 일은 피하는 것이 좋겠소. 혹시 병원 경비원으로 일해볼 마음이 있으면 여기에 있어도 괜찮으니 생각해 보시오."

 

그래서 경비원이 된 그는, 고마움을 갚을 길이 없던 터에 마침 사택으로 숨어드는 도둑을 발견한 것이었다. 경비원은 구두를 벗어놓고 발걸음을 죽인 채, 서재의 창문을 살폈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원장이 이미 도둑을 잡아놓고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도둑은 서재 앞에다 가져온 보자기를 펴놓고 책을 싸려고 한 모양이었다. "젊은이, 그 책 가져가면 고물 값 밖에 더 받겠소? 그러나 나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라오. 내가 대신 그 책 값을 쳐줄 테니 책을 두고 가시오. 무거운 책보다야 돈이 더 낫지 않겠소?" "원장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도둑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 돈을 가져가시오. 그리고 이 짓 말고 바르게 살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시오." "잊지 않겠습니다. 원장님." 도둑은 돈을 받아 들고 허둥지둥 달아나 버렸다.

 

경비원은 사라지는 도둑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 커다란 감동 하나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 할머니가 두고 간 달걀 3개

 

거제보건원의 정희섭 원장은 선생이 월남해 왔을 때 부산 제3육군병원의 원장으로 그를 받아주었던 사람이다. 그런 인연으로 선생은 2주일에 이틀씩은 거제도에서 환자를 보기로 했다. 그가 오는 날은 병원이 장날처럼 붐볐다. 외딴 섬마을에서 오는 환자들은 바람이 불어서 배를 탈 수 없을까 걱정되어, 미리 병원 가까운 여관에 잠을 자기도 했다.

 

어느 할머니는 손자가 수술을 받고 퇴원하게 되는 날, 손수건에 달걀 3개를 싸와서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선생님, 우리 삼대독자를 살려주셔서 참말로 고맙습니다." 그는 순간 할머니의 얼굴에서 기도로 키워주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 손자의 병은 제가 낫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조금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을요. 선생님이 수술하여 우리 손자를 안 살렸습니까?"

 

선생은 웃으며 설명했다. "할머니, 우리 몸에는 자기 스스로 낫게 하는 힘이 있답니다. 그 힘이 없다면 의사는 아주 작은 수술도 못한답니다. 할머니는 칼을 쓰시다가 혹 손을 벤 일이 있었지요?" "암, 있고 말고요." 할머니는 유명한 박사님이 이렇게 친절하게 물어오는 것이 고마워서 자세하게 대답하였다. "어디 약을 바르고 할 틈이 있습니까? 피가 멈추게 꼭 싸매두고 일을 하다보면 언제 나았는지 모르게 말짱해졌지." 할머니는 손가락의 상처 자국을 찾아내려고 앙상한 손을 펴서 들여다 보았다. "알 듯도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네요. 우리 손자를 선생님이 분명히 살려내시고도 그 공이 아니라고만 하시니..."

 

할머니가 두고 간 달걀 3개의 마음은 장기려 선생이 무의촌을 찾을 때마다 떠올랐다. "환자는 의사가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어도 고마워한다네. 그 고마워하는 마음이 병을 빨리 낫게 하는데 큰 몫을 하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네." 이것은 선생이 무의촌을 다니면서 깨닫게 된 것을 의사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말이었다.

 

 

참고> 장기려 선생님의 관련 글 정리


-  아고라 당분간 쉽니다....

출처 : 경제
글쓴이 : 공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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